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칠리아의 만종 (문단 편집) == 경과 == [[파일:팔레르모 봉기.jpg]] 미켈레 라피사르디(Michele Rapisardi) 작, 여인을 추행한 프랑스 병사를 살해한 시칠리아 민중. 바르톨로메오 디 네오카스트로(Bartolomeo di Neocastro)의 <시칠리아의 역사(Historia Sicula)>에 따르면, 팔레르모 시민들이 성벽 밖에 있는 성령의 교회까지 순례하러 가던 중에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들은 무기를 소지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시민들의 몸을 수색했다. 그러던 중 드로헷(Drohet)이라는 프랑스 군인이 팔에 갑옷을 착용했는지를 확인한다는 구실로 어느 귀족 여인의 가슴을 만졌다. 그러자 한 청년이 분노해 그 군인을 살해했고, 시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프랑스 병사들에게 달려들어 때려 죽였다. 그 후 그들은 루지에로 마스트랑겔로(Ruggiero Mastrangelo)라는 귀족의 지휘 아래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앙주 왕조를 위해 일하던 관료, 병사 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프랑스인들을 학살했다. 이날 2,000명의 프랑스인이 하룻밤 사이에 살해되었고, 앙주 왕조의 '''재상''' 장 드 생 레미(Jean de Saint-Rémy)는 야밤에 비카리 성으로 도망쳤다가 끝내 체포된 후 [[능지처참|온 몸이 갈기갈기 잘려서]] [[식인|짐승에게 먹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 사건을 다룬 13~14세기 연대기가 여럿 존재하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한 연대기에서는 프랑스 병사가 여인을 추행하자 아이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병사가 아이를 잡으려 하자 민중이 분노해 병사를 때려죽이고 봉기를 일으켰다고 기술했으며, 또다른 연대기에서는 병사가 한 여인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키스하려 하자, 그 여인의 오빠가 분노해 병사를 단검으로 찔러 죽였다고 기술되었다. '시칠리아의 만종(晩鍾)[* 저녁시간에 교회나 절에서 치는 종]'이라는 표현은 [[샤를 8세]]가 1494년부터 이탈리아를 정복하려고 전쟁을 벌였으나 실패한 후인 16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페사로 출신의 판돌포 콜레누치오(Pandolfo Collenuccio)는 자신의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우리가 여전히 사용하는 '시칠리아 만종'이라는 표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때부터 1282년 봉기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부활절 월요일(3월 30일) 또는 화요일(31일)에 팔레르모 시민들이 저녁 기도 시간에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프랑스군과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한다. 아무튼 봉기를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수많은 프랑스인을 살육한 팔레르모 시민들은 4명의 "사람들의 대장(capitaines du peuple)"과 5명의 "고문(conseillers)"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임시 의회를 열었다. 이후 팔레르모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한 코를레오네(Corleone)에서도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인들을 처단한 후 자체적으로 의회를 세웠고, 팔레르모에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가 힘을 합쳐 결성한 롬바르디아 연맹을 따라서 시칠리아 도시 연합인 시칠리아 연합을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뒤이어 바 디 노토(Val di Noto: 시칠리아 남동부), 바 데모네(Val Demone: 시칠리아 북동부) 등지에서도 봉기가 잇따라 일어났고, 4월 중순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의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4월 28일, 봉기군은 메시나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함대를 파괴했고, 카를루 1세의 대리인으로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오를레앙의 에르베르트를 칼라브리아로 축출했다. [[파일:시칠리아 봉기군을 피해 달아나는 프랑스 여인들.jpg]] 도메니코 모넬리(Domenico Morelli) 작, <시칠리아 만종> 시칠리아인들은 카를루 1세의 압제를 도운 프랑스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다만 카를루 1세의 시종이자 프로방스 데 포자레 가문의 일원이었던 굴리에모 3세는 평소 의로운 일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시칠리아를 떠날 수 있었다. 한편, 시칠리아 중부의 엔나 지방에 속한 스프링가(Sperlinga) 성은 프랑스 군인들에 대한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13개월 동안 그곳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주민들은 성을 수비하는 프랑스 병사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이 병사들은 13개월 만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항복한 뒤 칼라브리아로 이송된 후 카를루 1세로부터 굳건한 충성심을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영지를 제공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